관대함, 포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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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28회 작성일 25-04-19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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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신문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폐렴으로 인해 입원 치료를 받고 있던 프란치스코 교황을 칭송하며 “종교 개혁의 대상이었던 카톨릭이 가장 신뢰받은 종교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그의 역활이 곳곳에서 재조명 되고 있다”라고 말하며 그의 역활에서 가장 중요하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관대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교황의 “관대함”을 설명하기 위해 한 동영상에서 보여진 교황의 모습을 예로 이야기 합니다. 이 영상은 2018년 이탈리아 한 성당 뒤 뜰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어린 소년의 질문을 받는 장면입니다. 에마누엘레라는 이름의 어린이는 교황 앞에서 울다가 귓속말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아빠는 착한 사람이었고 저를 포함 4명의 자녀에게 세례를 받게 해 주었어요. 그런데 아빠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아빠가 천국에 갔을까요?” 이 질문에 교황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라며 “하느님이 착한 사람을 저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하느님이 자기 자녀들을 버리실 분인가?”라고 청중에게 되묻습니다. 청중들은 입을 모아 “아니오”라고 답합니다. 교황은 이어 에마누엘레에게 “바로 이게 하느님의 답”이라면서 “하느님은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을 것이고, 무신론자임에도 4명의 자녀에게 모두 세례를 받게 했으니 하느님은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글은 “한국 사회에서 왜 가톨릭은 성장하고, 개신교는 쇠퇴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한 사회학과 대학원생의 논문을 통해 가톨릭 교회의 ‘관대함’이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말합니다. 글을 마치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관대함”이 한국 개신교의 흐름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하며 글을 맺습니다.
많은 개신교회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요즘 자주 보여주는 몇몆의 극단적인 모습이나, 세상의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모습이 있는 것도 분명 사실입니다. 개신교회의 그러한 모습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분명 바뀌어야 하고 변화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를 바꾸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구원은 분명 예수님을 믿고 영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장12절
단순히 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3장28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장8-9절
우리의 삶에 관대함은 분명 필요합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좁은 마음은 나와 주위를 분명 어렵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대함이 하나님의 진리를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우리가 괜찮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관대함이라는 단어는 참 좋지만 우리의 관대함이 하나님의 기준을 넘어서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영국 햄프셔의 한 초등학교가 매년 진행해 오던 부활절 행사를 “포용성과 다양성 존중” 이라는 학교의 가치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취소됐습니다. 교장은 “앞으로 전통적인 부활절 예배와 모자 퍼레이드를 개최하지 않을 예정” 이라는 공문을 학부모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포용성을 기념하는 방법 중 하나는 6월에 열리는 ‘난민 주간’에 참여하는 것과 공인된 난민학교가 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덧붙혔습니다. 그 지역은 기독교인이 45%, 무종교인이 45%, 그리고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각각 1%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난민들을 돌보고 다른 종교나 사람들을 돌보고 사랑하는 일은 기독교인들이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포용성이나 관대함이라는 좋은 단어를 가지고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내가 기준이 되어, 내가 정의한 관대함과 내가 생각하는 포용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관대함과 포용성을 가지고 내 주위와 이웃을 돌보며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관대함과 포용성이 주님의 말씀, 성경의 기준을 벗어나는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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