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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로스 11기 독후감 - 철저한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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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승현
조회 518회 작성일 25-04-2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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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계속 말씀을 계속 묵상하게 되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끝냈을 뿐만 아니락, 그분의 모든 진정한 추종자들의 첫 번째 생명, 즉 옛 생명을 끝낸다. 십자가는 신자의 삶 속에 잇는 옛 본성, 다시 말해 아담의 본성을 멸하여 끝낸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 곧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리신 그 하나님께서 신자를 살리시며, 신자에게서 새 생명이 시작된다. 


칭의는 우리의 입맛대로, 우리의 기분대로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십자가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으로 지고 갈 수 없다는 진리를 항상 명심하라. 십자가를 져야 하기 때문에 당신은 그들 속에서 외롭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를 집어 드는 순간, 그는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했다. 십자가를 집어 들었을 때 그는 십자가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십자가는 그의 삶을 철저히 간섭하는 것이 되었다. 그가 무엇을 하기 원하든지 간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이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자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회개하고 믿어야 한다. 죄를 버려야 하고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한 다음 부활의 주님을 오직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십자가와 보좌가 있다. 그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까지는 그가 보좌 위에 앉아 있다. 십자가를 거부한다면 그가 계속 보좌 위에 있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복음을 믿는 신자들의 신앙적 침체와 세속성의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십자가의 자리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적당히 지혜롭게 내 삶을 추구하며 동시에 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자리는 세상에서 “적절하게 나이스”한 사람의 모습으로 어느 정도 “삶을 윤택하게 일구어낸” 사람의 모습으로 어느 정도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크리스천의 바람직한 생활 모습에 기울어진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 삶을 송두리째 주님께 맡기고, 겸손과 순종의 모습으로 나아갈 때 조금은 더 다가가고 있는 자리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라는 구호 아래,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방법을 내가 정의하고 - 내 삶 속에서 어느 정도 괜찮아 보이는 목표가 이루어진 시점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시점으로 믿으며 걸어간다면 그것은 나를 부인하는 자리일 수도 없고 내 십자가가 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하루의 삶가운데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걸어가는 가운데 하루를 보내고 그것을 그날의 기쁨으로 누리는 작은 순종의 삶이 이어질 때, 하나님이 이루어가시는 일을 감격으로 보게 되는 은혜의 삶에 한 발 더 다가가게 된다. 이러한 삶의 방향은 자주 세상의 가치관과 충돌함을 보게 된다. 세상이 여러 사람과, 많은 미디어를 통해서 알려주는 지혜는 나의 목표와 그것을 이루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라가는 길에서조차 보기 좋음직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위해 기독교 식으로 기도하는 것이 그럴싸해 보이게 만들어버린다. 이에 반하는 작은 순종의 삶은 주님과 지극히 인격적인 관계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누구와 함께 나누기 쉽지 않은 일상의 걸음이 되겠지만, 주님을 깊이 만나는 시간이 자라나고 있기에 혼자여도 두렵지 않고 외롭지 않은 삶이 될 수 있다. 그 순종의 끝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자리이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내 안에서 사심이 믿어지는 은혜를 허락하셨기에 그 길은 어느덧 담대하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된다.


 

옛 십자가가 아닌 새 십자가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전도 방법을 조장한다. 새 십자가를 전하는 복음전도자는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옛날의 삶을 버려야 합니다”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세상과 기독교 사이의 다른 점을 전하지 않고 비슷한 점을 전한다. 그는 기독교가 불쾌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고 선포함으로써 대중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쓴다.  


이 세대의 생각과 가치관은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복음의 전함의 첫 발걸음이 된다고 믿게 되고, 좋은 관계를 맺는 다양한 방법을 세상에서 얻은 경험 중에 선별적으로 찾아서 적용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결국 전해야 할 것은 복음이고 그것은 “이해”가 아니라 “전함”과 “선포”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짐을 고백해야 한다. 내 삶 속에서 복음을 전할 상대 앞에 섰을 때 상황을 이해하는 것보다 주님의 은혜를 온전히 구하는 것이 앞서야 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이 전해지도록 항상 힘써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이 선택하라고 말씀하신 나를 부인하는 것이고, 십자가로 나아가는 순종의 여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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