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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로스10기_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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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민정
조회 173회 작성일 24-01-03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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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도 상상도 해본 적 없었던 타국생활을 시작하고 몇년이 지난 일이다. 당시 나는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몹시 메마르고 지쳐있었다. 오전내내 씨름하던 아이가 낮잠을 자기 시작하자 소파에 늘어져서 여느때처럼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의 sns를 넘기며 그들의 화려한 커리어, 멋지고 세련된 외모, 자유로운 생활… 언제 갈아 입었는지 기억도 나지않는, 아이가 잡아당겨 목이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무릎이 다 튀어나온 파자마에 정돈되지 않아 부스스한 머리, 푸석해진 피부로 휴대폰을 넘겨보던 나는 어느새 짙은 패배감에 휩싸였다. 마치 나만 빼고 모두 꽃길을 걷는 것만 같았다. 아이가 우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을땐 두어시간이 지난 뒤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그가 가는 길에 함께 하는 것이 꽃길인줄만 알았는데 지금은 길도 아닌, 한발자국 내딛을 수도 없는 진흙탕 속에 빠져있는 느낌이었다. 

 그런 나날들은 며칠이고 이어졌다. 친구들이 여행을 떠난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참 너희가 부럽다’ 고 댓글을 남겼다. 하지만 나의 댓글에 이어진 친구의 말은 나를 너무나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항상 여행하고 있는 것 같은 너가 더 부러운데? 넌 항상 꽃길만 걷는듯’.. 그때부터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우리가 걷고자 하는 꽃길은 모두 허상이라는 것을. 

 믿음이 생기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신앙이 자라며 그 생각은 점점 또렷해졌다. 그러던 중 만나게 된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은 나의 과거에 정의를 내리고 갈무리하게 해주었고 미래의 비전을 보여주며 현재의 나의 상태까지 점검해주는 운명같은 책이었다. 

 

 저자는 세상적인 꽃길의 조건을 외부세계 혹은 공적세계라 말한다. 그것은 가늠할 수 있고 눈에 보이며 확장 가능한 세계다. 우리의 외부세계는 일, 놀이, 소유 그리고 사회적 연결망을 구성하는 수많은 친분관계로 이루어져있다. 그것은 성공, 인기, 부, 미모 등으로 쉽게 평가할 수 있는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젊은 시절의 나는 그 공적세계를 다듬고 확장시키기 위해 모든걸 바쳤다. 목적은 간단했다. 그 꽃길에는 행복이 있을것이 틀림없으므로. 부모세대로부터 물려받지 못했던 행복, 내 손으로 쟁취하기 위해 나는 달렸다. 하지만 사실은 나는 달린것이 아니라 ‘쫓겨다니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인정하게 되었다. 쫓아오던 것들을 손에 쥐고 나서 돌아보면 꽃길이 아니었다. 하나만으로 부족한것 같아 여러개를 움켜쥐고 돌아보아도 꽃길은 아니었다. 

 ‘용기', '희망’, ‘사랑’, ‘인내’, '기쁨’, ‘평안’ 읽기만 해도 가슴뛰는 단어를 이 책의 마지막에서 발견한다. ‘자제력이라는 흔치않은 능력’, ‘악을 분별하고 진리를 찾아내는 능력’은 나에겐 초능력과도 같다. 꽃길에 있을줄만 알았던 이 열매들은 길에 떨어져 있어 하나씩 주워가는 것이 아니었다. 길을 완주하게 된후 마지막에 얻게되는 보상도 아니다.  

 그렇다. ‘열매’는 ‘정원’에서 자란다.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열매가 가득한 싱그러운 정원, 정적이고 고요하며 따스하고 포근하다. 나를 이끄는 조종실.. 그곳이 바로 ‘내면세계’다. 행복은 꽃길에 있을거라는 망상은 그동안 누가 심어줬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내가 추구했던 행복은 바로 그 내면의 정원에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책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유 중 하나는 ‘행복의 열매는 내면세계에 있다’는 추상적인 결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마치 ‘Gardening 101 : Tips and Tools’  처럼 내면세계, 즉 나의 내면의 정원을 가꾸는데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책들을 통해 알게된 정원 가꾸는 방법 첫째는 정원을 가꾸는 시간을 잘 경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내면의 정원은 언제든 잡초로 무성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길이라는 이미지보다는 훨씬 정적인 느낌이지만 실제로는 더욱 활력이 있고 역동적인 곳이 바로 정원이다. 생명이 있는 그곳에는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잡초들도 무성히 자란다. 며칠만 방치했다가는 정원이라고 부를수없는 곳이 되어버리고 만다. 저자는 그것을 ‘무질서 상태’라고 부른다. 무질서 상태에 이르렀을때 자존감이 낮아지는 경험을 한적이 있을 것이다. 무질서한 사람은 자신이 한 일이 보잘것 없다고 여겨진다. 무질서한 내면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거의 누리지 못한다. 하나님은 잘 정돈된 정원에서만 거니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원을 가꾸기 위해 ‘시간경영’을 잘 해야하는데 시간경영의 마스터이신 예수님께 배워야 한다.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먼저,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계셨고 제자를 훈련하기 위한 시간은 항상 따로 떼어놓으셨다. 나도 생각해보면 말씀과 기도생활을 규칙적으로 하다가 무너지는 경우는 여행을 다녀오거나 아이의 방학 중 혹은 긴 연휴 때이다. 

아이를 보내고 오전시간을 말씀과 큐티, 기도 생활로 채우는데 그 오전시간이 고정된 시간이 아닌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는 생활리듬에 맞추어 생산성이 가장 높은 시간대를 정해 아무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정하라고 말한다. 

 두번째 방법은 지혜와 지식 쌓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무지성은 내면세계를 무질서하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라고 한다. 이것은 의외이면서도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에 대한 대답을 받은 기분이었다. 실제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생각이란 사실과 교리적 체계와 규율을 머릿속에 주워담는것이라고 오해한다. 나 역시 신앙서적이외에 다른 서적을 읽는 것들에 죄책감을 가진적이 있다. 저자는 지적 성장에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의 내면세계는 나약해지고 무방비상태가 되어 무질서 해지고 말것이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명심할 것은 최선의 사고는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시는 왕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할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역사가 어느방향으로 흐르는지 알아야하고 인류의 위대한 사상을 파악하고 씨름하는 법을 배워야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독자적 판단을 내릴줄 알아야 한다. 특히 요즘과 같이 악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로서 영적인 분별력이 얼마나 필요한지 절절히 느끼는 요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성은 기독교적으로 사고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기독교적 사고는 모든 쟁점과 사상을 하나님이 원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관점에서 조망한다.

 우리의 지성은 하나님이 창조세계안에 기록해두신 메시지를 발견하고 감사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우리의 지성을 공적 세계에 속한 사람들을 섬길 목적으로 정보와 아이디어와 통찰을 추구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는 말은 나를 위해서도 필요한 말이지만 다음세대의 아이들을 하나님의 영적인 군사로 훈련하는 데 반드시 기억해야할 말인것 같다. 

 세번째 방법은 내면의 정원을 가꾸는데는 영적인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침묵과 고독을 추구하고 찬양하며 규칙적으로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며 사색과 묵상을 경험하며 예배하고 중보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정원을 가꾸는 것은 열매를 자라게 함이 궁극적인 목표인데 자라는 잡초만 잡아뜯을 것이 아니라 밭도 갈고 씨도 뿌리고 꾸준히 물을 주고 햇빛을 쐬게 해야하는 것이었다. 말씀이라는 씨를 뿌리고 순종으로 자라고 성령의 비를 내리고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면 열매는 자라게 된다. 그 정원에서 예수님 무릎에 기대어 눈을 감고 음성에 귀 기울이며 속삭이는 상상을 하니 아, 천국이 바로 이곳이구나 싶다. 그렇게 면면히 들여다보니 내가 내 정원을 가꾸는데 부족한 부분이 어디인가 밸런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어디인가를 좀더 쉽게 알수 있는 것 같다. 한편 정원을 가꾸는데 또다른 열심으로 쫓김으로 하지 않는가를 꾸준히 돌아보아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정곡을 찔린다. 그렇게 이어진 마지막 방법이 바로 ‘쉼’ 이다. 쉼이란 그저 일에서 손을 놓거나 여가를 즐기는 것이 아니다. 섬김을 내려놓고 말씀과 기도생활을 잠시 쉬는 것이 쉼이 아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 무릎에 기대에 영혼의 안식을 하고 있는가. 열심히 정원을 가꾸고 돌보고 열매 맺히는 데 혈안이 되어 어느새 마르다가 되어 있지는 않았나 돌아본다. 주일 예배가 스케줄이 되고 일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날개 아래 거하는 진정한 쉼이 되기를 훈련해야 한다. 

 나는 이제서야 꽃길의 허상에서 벗어나서 정원에서 쉼을 누리려고 한다. 때로 정원을 가꾸는 일을 쫓기는 일처럼 하는 세상적인 버릇이 여전히 남아있기는 하지만 내면세계 정원의 존재가 이제는 나에게 더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답이 있는 곳임을 안다. 하나님께서 나의 정원을 거니시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그곳이 천국이다. 늘 두렵기만 하던 광야에서의 훈련이 나의 정원을 업그레이드(?)시켜주는 부스터란 생각을 하니 이 또한 감사고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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